“북산의 나무가 비록 아름다워도 성대한 궁전에 쓰려면 반드시 깎아내고 다듬어야 한다. 곤륜산의 옥이 아무리 훌륭해도 제후들이 장식하는 옥으로 사용하자면 반드시 쪼아내고 갈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의 자질이 비록 빼어나도 큰일을 할 그릇으로 쓰려면 반드시 벗이 이를 도와주어야 한다. 어질지 않은 사람과 벗으로 사귀면 서툰 목수가 목재를 다듬거나 용렬한 장인이 옥을 다듬는 것과 같아서 성취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이는 조선 중기에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낸 문장가 申欽(1566-1628)의 「擇交篇」에 나오는 교훈이다.
이에 대해 한양대학교 鄭珉 교수가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여 새김질을 해놓았다.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숲 속에서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위로만 쭉쭉 뻗어 오른 아름드리나무는 참으로 장한 기상을 지녔다. 하지만 이것이 동량재의 재목으로 크게 쓰임을 받으려면 이를 베어내는 사람, 운반하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잘 건조시켜 결을 따라 다듬고 깎아내는 훌륭한 목수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곤륜산의 옥을 가장 으뜸으로 치지만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공정이 없다면 그냥 보통의 돌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 돌덩이 속에 숨어있는 옥을 찾아 광택을 내고 숨어있는 본디의 빛깔을 드러내어 눈부시게 만드는 것은 장인의 솜씨이다.
사람이 아무리 잘나고 유능해도 자기 혼자서는 솟을 수 없다. 훌륭한 스승과 유익한 벗이 있어 곁에서 끌어주고 밀어주며 도와줘야 되는 것이다. 훌륭한 재목이 못난 목수를 만나는 것은 큰 재앙이다. 값진 옥이 안목 없는 장인의 손에 놓이면 그냥 일반 돌 같이 취급되어 들고 있는 사람의 뒤꿈치만 상하게 한다. 보석을 알아보더라도 안목과 솜씨가 없으면 귀한 재료를 이리 깎고 저리 깎아 못쓰게 만들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타고난 본바탕 자질이 뛰어나도 나쁜 친구나 무능한 스승과 만나면 함께 진흙탕에 뒹굴게 된다. 어찌 스승과 벗의 만남을 소홀히 하겠는가?
일찍이 임마누엘 칸트가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교육 이전의 인간과 교육 이후의 인간은 어떻게 다를까? 이는 재료와 제품의 차이쯤 되지 않을까 싶다.
흙이라는 재료가 어디에 놓이냐? 누구 손에 들리냐?에 따라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고 있는가.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 손에서 반죽이 되고 빚어져 고온의 가마를 통과하면 천정부지의 값진 도자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수채바닥의 진흙이 되면 악취를 내고 생명을 죽이는 오염된 하천바닥으로 끝나지 않겠는가? 훌륭한 나무라도 나뭇꾼의 손에 들려 장작으로 쪼개지면 하룻밤 난방용으로 타서 없어질 것이고 훌륭한 목수의 손에 들리면 7년 이상 다듬어져 임금님 서재의 책꽂이로 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