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이렇게 지내고 있어
작성자
최*하
작성일
23.07.07
조회수
190

나는 요즘 이렇게 지내고 있어

 

더작은재단은 서울 북촌에 있다. 그동안 북촌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한옥마을이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라 근처에 인사동, 안국동, 익선동, 종로, 청와대가 있고, 광화문, 경복궁, 창경궁 등의 고궁도 많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많다.

나는 손님을 만나야 할 때, 북촌으로 오십사 하는 경우가 많다. 경관도 좋고, 분위기가 밝다. 밝은 날이든 흐린 날이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갈낙엽이 흩뿌려질 때도 참 좋다. 시가 저절로 나올 때도 있다.

그리고 주위의 풍광뿐만 아니라, 내가 근무하는 ‘오픈아이즈센터’ 건물과 내부가 참 예쁘고 좋다. 개인적으로 내가 그동안 접한 건물 가운데 가장 예쁘고 좋은 공간이 ‘오픈아이즈센터’다. 그래서 사역자들이나 교사들, 학생들, 여러분들이 잘 찾아오시는 것같다. 비단 건물만이 아니라, 더작은재단의 사역자들이 밝고 경쾌하고 친절하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북촌으로 와달라고 할 때가 많다.

 

두 분의 손님이 찾아오셨다.

한 분은 나의 중학교 3학년 때 담임교사였던 백승구 선생님, 그리고 또 한 분은 나에게 처음으로 기독교사라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던 경동호 선생님이시다. 이제 연세가 꽤 되어서 백승구 선생님은 81세, 경동호 선생님은 90세다.

이 두 분은 같은 교회를 섬기시는 분이다. 백선생님은 감리교 권사님, 경동호 선생님은 장로님으로 동대문교회를 섬기신다. 사실 두 분을 몇 년 전에 아버지학교 강의 때 뵈었었다. 지원자로 두 분이 오신 것을 강의 중에 알고, 무척 놀랐고, 그때 하던 강의를 잠시 멈추고 지원자 아버지들께 이 두 분을 소개했던 기억이 있다.

 

백승구 선생님은 체육선생님이셨는데, 항상 우리에게 강한 마음을 불어넣어주셨다.

“너희들! 무엇 때문에 무엇을 못하는 것이 아냐, 그럼에도 할 수 있다고~.”

이 말을 자주 하곤 하셨다. 이 말이 나에겐 삶의 좌우명이 되었고, 지금도 이 말을 자주 기억하고 사용하곤 한다.

‘~because of 가 아니라, ~inspite of’로‘

이 말은 결국 세상의 무엇, 어떤 이유 때문에 복음 사명을 감당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그러함에도 가능하다는 성경의 진리였다.

선생님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백선생님의 말씀으로 제자인 나에게 인생의 좌우명이 생겼으니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경동호 선생님은 시를 쓰는 모임에서 뵈었다.

1990년대 중반, 한국가곡작사가협회에 소속된 시인들이 시를 작사해서, 한국작곡가협회 작곡가들에게 드리면 곡을 붙여 발표하는 활동을 했었는데, 그 모임에서 만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30대 후반이었고, 경선생님은 서울사대부고 교감으로 퇴임할 무렵이었다.

그분이 어느 날 그 당시 양다리 신앙인이었던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최선생, 교회 나가는 선생님들 모임이 있는데, 한 번 와보지 않겠어요?

그렇게 나는 1997년 한국교육자선교회에 첫발을 딛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20여 년을 같은 길을 걸어온 것이다. 경동호 선생님을 통해 나는 기독교사로서의 길을 알게 되었고, 수십 년 복음으로 제자들을 키우는 기독교사의 길을 걸어오게 된 것이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무척 반가웠다. 눈물마저 핑 돌았다.

나를 이렇게 성장시켜주신 선생님, 그리고 연로하셔서 노인이 되신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건강하신 모습에 참 감사했다.

오픈아이즈센터를 구경시켜드렸다. 그리고 상세히 안내를 해드렸다. 재단 사역자들도 인사를 시켜드렸고, 센터 옥상에 올라가 안국동, 가회동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며 설명해드렸다. 근처에 정독 도서관, 헌법재판소 등도 안내했다. 그리고 재단을 세우신 오대표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선생님들은 말씀하셨다.

“정말 소중한 일을 하십니다. 놀랍습니다. 그리고 참 감사합니다.”

식당으로 이동을 했다. 삼계탕으로 식사를 대접했다. 내 생각보다 두 분이 식사를 잘하셔서 기뻤다. 그런데 백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최선생. 사실 내가 몇 달 전에 위 수술을 했어. 암 초기 진단이 나와서, 난 그냥 80정도 살았으니까 살다가 천국 가면 된다고 했더니, 가족들이 난리가 나서 수술을 했지 뭐야. 식사는 할 수 있는데 현재 많이는 못 먹어. 그러니까 이 맛있는 국물까지는 다 못 먹으니 최선생, 그리 이해해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마음에 짠~하는 울림이 있었다.

 

선생님들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얼마 전 출간한 내 책과 선물, 그리고 편지를 쓴 봉투 등이 담긴 쇼핑백을 드렸다. 그리고 한 번씩 꼭 안아드렸다. 헤어지는 인사를 나눌 즈음, 경동호 선생님께서 나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최선생, 사실 나는 요즘 이렇게 지내고 있어.”

내 손에 건네시는 것이 있었다. 엽서만한 크기의 그것은 전도지였다. 앞에는 윤동주의 시가 적혀 있었고, 뒤에는 성경 말씀이 있었다.

“최선생,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이것 들고, 거리에서 학교 앞에서 지하철에서 나눠주고 있어. 예전에는 중고생들한테 많이 갔는데, 요즘은 대학가, 청년들한테도 많이 가고 있어. 청년들이 요즘 많이 힘들잖아.”

이 말씀을 듣는 내 마음이 뭉클하며, 이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행동하는구나. 이렇게 사는구나. 그래~, 그런거지.’

 

나에게 영향을 주셨던 두 분의 선생님. 노년에 이르기까지도 하나님 영광 위해 사시는 모습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두 분을 통해 끝까지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하며, 두 분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