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자의 금산교회를 섬긴 조덕삼과 그의 마부 이자익
작성자
김*영
작성일
10.08.27
조회수
1656

‘ㄱ'자의 금산교회를 섬긴 조덕삼과 그의 마부 이자익

 

2009년 11월 8일 John T. Lee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출생한 이자익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집은 부모님이 돌아 가신 후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끼니 구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얻어 먹었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고 가출하였습니다. 이리 저리 다니다가 온 곳에 곡창지대 김제였습니다. 전라도 곡창지대로 가면 밥은 먹고 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먼 길을 걸어서 김제까지 왔고, 그는 훌륭한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 길은 금산사로 향하는 길이었고, 한 길은 마부 조덕삼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만약 금산사로 향했다면 그곳에서 허기를 면하며, 금산사를 섬기는 승려가 되었겠지만, 그는 다행히도 마음씨 좋은 지주 조덕삼을 만나서 그의 머슴이 된 것입니다.

 

금산교회의 교회당이 ‘ㄱ’자로 지어진 것은 당시 구습에 따라 남자석과 여자석을 따로 하기 위함이었다. 출입구도 남쪽과 동쪽으로 따로 내었고 남녀석 코너에 흰 포장을 쳐서 일절 서로 쳐다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조씨네 부자집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밥만 먹여주면 머슴이 되겠습니다. 시키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머슴으로 써주었습니다. 그는 정말 부지런하게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총명하고 성실하여 주인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아들 조영호가 천자문과 한글을 배울 때 이자익도 어깨너머로 혹은 창 밖에서 보고 들으며 글을 터득했습니다. 그 때 한국 개신교 선교초기에 전라도지역은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구역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인천을 떠나 군산으로 들어왔고 전남북지역에서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1900년대 초, 김제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온 테이트(한국 이름 최의덕, L. B. Tate) 선교사가 김제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도 나왔다가 두정리 마을의 지주 조덕삼을 만났습니다. 조덕삼은 전주지역에서도 널리 알려진 큰 부자였는데 서양손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잘 대접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된 조덕삼은 주일마다 말씀을 듣기로 하고 사랑채를 내주었습니다. 선교사가 마방을 드나들면서 전도하다가 이자익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이자익 청년도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 가족도 함께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나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ㄱ’자 모양의 금산교회입니다. 당시 금산교회가 위치한 모악산 자락은 증산도를 비롯하여 말세에 불안한 민중들이 ‘생명을 보전하러’ 몰려들 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금산에 들어와 살다가 예수를 믿게 된 교인들은 ‘ㄱ자' 예배당을 지으면서 그곳을 영원한 하늘의 장막에 들어가기까지 한시적으로 머물 ‘거룩한 공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보다 미래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그 꿈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금산교회 현재의 모습 : 한국에서 하나 밖에 없는 ‘ㄱ’자 교회로 현재 전북 문화재 제 136호로 지정됨 ]
 

조덕삼과 이자익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 1902년 가을에 함께 세례를 받고 얼마 후에는 집사직도 받았습니다. 최의덕 선교사 선교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이자익 청년을 설교자로 임명하였습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 맡길 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조덕삼은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설교자가 된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은혜도 충만히 받았습니다. 조금도 시기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09년이었습니다.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데 조덕삼과 이자익이 장로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투표를 하였습니다. 교인들과 동네 사람들은 조덕삼 씨가 장로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엉뚱했습니다. 투표 결과 이자익 청년이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조덕삼은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 결과를 놓고 웅성거렸습니다. 그때 조덕삼이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교우들이여! 참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자익은 장로로 선출하여 일하게 하였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젊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열심히 있습니다. 우리 이 자익을 장로로 잘 받들어 교회를 성장시키십시다." 모두가 감격 속에서 박수를 쳤습니다. 조덕삼 집사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인들을 격려하며 자신의 머슴 이자익을 장로로 섬겼습니다.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 모두 놀랐습니다.
 

 
 

소작농이나 머슴을 비천하게 여기며 양민과 천민 신분 구별이 철저했던 때였지만 조덕삼은 믿음으로 신분의 구별을 뛰어 넘었습니다. 두 사람의 믿음과 헌신 그리고 겸손한 신앙생활은 선교사들과 교인들의 칭송거리가 되었습니다.
 

 
 

1년 후에 조덕삼 집사도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와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가 비록 머슴이지만 하나님께 크게 쓰일 수 있는 믿음의 자질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권하고 학비를 지원해서 1910년에 평양신학교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5년 만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자익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조덕삼은 그 때도 이자익 목사를 자기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머슴의 신분이었던 이자익을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인격이 뛰어난 사람의 후원 덕분에 이자익 목사는 그 후 한국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됩니다. 그는 1924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총회장이 되어서 조선의 모든 교회를 지도했습니다. 해방 이후로도 일제 때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려면 그의 지도가 필요하다며 1947년과 1948년에도 총회장을 맡았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총회장을 역임했을 만큼 교회의 큰 일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사학자 김수진 씨는 “머슴 이자익이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실한 신앙에다, 훌륭한 인격자였던 조덕삼 씨의 사랑과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고 비천한 자를 섬기고 후원하여 하나님의 큰 일꾼 만든 조덕삼 장로의 인품이야말로 가장 예수님을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져서 머슴인 이자익 목사를 잘 받들어 섬겼던 조덕삼 장로는 집안 대대로 하나님께 크게 세움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후 조덕삼 장로의 아들 조영호 씨도 후에 장로가 되었고 손자 조세형(전, 국회의원)씨도 장로가 되어 서울 무학교회를 잘 섬겼으니 3대를 이은 신앙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